이상한 정상 가족 | 김희경

해아심이 2019. 2. 15. 17:40

 초판 8쇄, 20181105, 김희경, 도서출판동아시아, 20191214 마샘구입



사회의 가장 작은 단위지만 가장 중요한 곳,

바로 가정에서 일어나는 아동의 권리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책이다.

나 또한 가벼운 체별에 대해서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던 사람이다.

체벌과 학대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 책을 통해서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은 바로 오십보 백보, 한발과 두발 차이라는 것이다.

가볍다고 하는 체벌들도 체벌을 받는 이들에게는 내면화로 자리하게 되고

가해자는 한발이 두발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체벌 금지'는 가정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동감한다.

계속 이어 왔던 혈통으로 이루어지는 가족의 의미가 많이 무색되고 있다.

결혼으로 이루어진다는 가족의 의미에서 이제는 결혼.혈통으로 이루어지지 않지만 많은 유형의 가족이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가족을 만드는 것은 어른들이지만,

그 가족이라는 울타리안에서 아동들은 제대로 인권 보호를 받고 있는가? 아동 인권 보호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쉽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유엔아동권리협약>의 '아동 최선의 이익의 원칙'과 아동의 인격존중과 개별성을 인정한다면,

그 해답은 의외로 쉬울 수 있다.

하지만, 사회여건은 그 해답을 받아 들이기에 성숙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가?

스웨덴의 사례는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사회적 공감대 형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

"한 사회가 아이들을 다루는 방식보다 더 그 사회의 영혼을 정확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것은 없다." (넬슨 만델라, 5쪽)


체벌은 언제나 단 하나의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전달한다. 바로 체벌이 언제라도 반복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너의 몸은 온전히 너의 것이 아니며, 나는 언제든 너에게 손댈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체벌에 동의한다는 것은 이 가르침을 수용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모욕의 역설을 이해하게 된다. 모욕은 타인의 인격을 부정할 뿐 아니라, 그러한 부정에 대해서 부정당하는 사람의 동의를 강요한다. 모욕당하는 자가 모욕에 동의하는순간, 모욕은 더 이상 모욕이 아니다. 그것은 의례의 일부이며 질서의 일부가 된다. 결국 모욕은 바신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을 최종적인 목표로 삼는 폭력이다. (김현경 [사람,장소,환대] 중, 29-30쪽)


데이트폭력의 피해자는 연인을 잃는 게 두려워 가해자의 말들을 내면화했다면,

학대로 희생된 아이는 살아남기 위해 가해자의 논리를 내면화했다. (37쪽)


공통원인을 찾아내어 여기에 해당되고 확대의 조짐을 보이는 '취약가정'에 지원을 집중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예측을 하려는 이유는 보이지 않는 아이들을 보이게 하기, 즉 집 안에서 떨고 있을 가장 취약한 아이들이 그들의 편을 들어줄 제 2자인 공공의 눈에 띄도록 가시화하기가 학대 예방에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64쪽)


기도를 할 때에도 남편과 자식들 말고 스스로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빌지 않는 엄마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갈아 넣어' 운영하는 '가족'의 성공을 꿈꾸는 야심가다. 이게 다 너를 위한 거라고 하지만 사실은 엄마 자신을 위한 것이다. 엄마 꿈의 대리 실현자가 된 아이는 희망의 포로다 (66쪽)


동네의 놀이터와 골목길은 아이들이 공적인 삶을 배우는 공간이다. 그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목적없이 놀면서 아이들은 낯섦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고 차이를 협상하고 갈등의 타협점을 모색한다. 그렇게 민주적인 마음의 습관을 키운다. 그런 물리적 공간이 아이들에게 필요하다.(75쪽)


어른들이 치기 시작한 벽이 아이들 사이에서도 자라고 한쪽은 소외감, 다른 쪽은 선민의식에 물들어 자라게 되는 것이다. (198쪽, 임대아파트비교)


국가는 어린이를 부모에게 귀속된 존재가 아니라 국가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는 개인으로 간주하여 보호제도를 운영한다. 국가가 아이들의 보호자 역할을 일정 부분 떠맡으며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할 아이들의 권리를 위해 필요하다면 부모 뜻을 거스르면서까지도 강제한다. 아이들의 인격권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가 전통적으로 '사적영역'으로 간주되던 가정 내에 개입해 '투명한 가족'을 창출한다. 체벌금지는 그렇게 스웨덴 정부가 아동권리와 관련하여 취해온 광범위한 정책의 일환이다. 신체적, 정치적 취약성에 특별한 주의를 필요로 하는 자율적 인간으로서 어린이를 바라보자는 정책인 것이다. (215-216쪽)


스웨덴의 중요한 이데올로기 중 하나는 개인적 삶의 독립성을 보장하되 개인 삶의 질은 집단적 책임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 문제를 집단적으로 해결해야 하며 거기에서 정부의 역할이 크다는 문화적 믿음이 강하다.(221쪽)


2011년 스위스 다보스 포럼에선 북유럽 국가들이 <노르딕 웨이>를 공동으로 발표했다. 여기에는 현대복지국가의권력관계에 대한 흥미로운 비교가 나온다. 복지국가의 사회적 계약에서 드러나는 개인-가족-국가간의 관계유형을 비교해 보니 미국은 개인-가족의 관계를 중시하고 독일은 국가-가족의 관계를 중시한다면, 스웨덴은 국가-개인의 관계를 중시한다는 것이다. (222쪽)


어떤 학자들은 이 같은 스웨덴의 국가주의적 개인주의를 '차가운 신뢰 cool trust'라고 불렀다.

친밀한 관계의 복종, 희생과 상호의존에 의해 형성되는 '뜨거운 신뢰 hot trust;에 대비하여

개인의 자율성과 평등에 대한 남다른 강조와 공존하는 높은 사회적 신뢰를 일컫는 말이다. (223쪽)


정치학자 조안 트론토가 [돌봄 민주주의]에서 말한 것처럼 돌봄은 공적 가치를 지닌 공공재다. 특정한 성, 계급에게 일임해서 해치울 일이 아니라 민주적 정부와 시민 모두가 책임져야 하는 과제다 (239쪽)


이렇게 한국 사회는 어른들의 사회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규정한 틀 안에서 액세서리나 소유물 취급을 받는다. 아이가 엄마에게 이르는 대신 직접 112에 폭력행위의 피해자가 됐다고 신고하면 가볍게 무시 당한다. 어른들이 생각하는 '아이다움'의 범주에서 벗어나면 처벌받거나 불이익을 받는다. (245쪽)


아이의 권리 인정과 부모의 보호가 평화롭게 공존할 때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문제는 아이의 구너리와 부모의 권리가 상충하고 부모가 아이의 안녕을 심각하게 침해할 때 선을 긋는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다. 협약은 이 책임이 국가, 공적 권력에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공적 권력이 개입할 때의 기준은 '아동 최선의 이익의 원칙'이다.

<유엔아동권리협약>이 다른 모든 인권협약들과 다른 점은 '아동 최선의 이익의 원칙'이 다른 모든 조항을 지배하고 협약 전체를 관장하는 '슈퍼 조항'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246-247쪽)


레베카 솔닛은 공감에 대한 아름다운 에세이 [멀고도 가까운]에서 사람은 타인에게 공감함으로써 자아는 확대되지만 그 다음엔 자아도 위험과 고통을 분담하게 된다고썼다. 공감이란 "자신의 테두리 밖으로 살짝 나와서 여행하는 일, 자신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진정으로 타인의 현실적 존재를 알아보는 일이며, 바로 이것이 감정이입을 탄생시키는 상상적 도약을 구성한다. (252-253쪽)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폭력에 반대하는 개인의 인권의식이지 남의 아이도 내 자식처럼 돌보는 엄마의 눈, 전 사회의 '확대 가족화'가 아니다. 모르는 사람이 아이를 때리는 것을 보았을 때 항의하고 신고해야 하는 이유는 사람이 더 약한 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되기 때문인 것이지, 우리가 모두 이웃의 아이를 함께 지키는 대가족 구성원의 마음자리를 가져야 하기 때문은 아니다. (259쪽)


<지인에게 책 대여후 인상 깊었던 구절이라고 한 대목>

세상을 더 낫게 만들려면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어보는 방식의 공감력 향상보다는 되레 한발 물러나 객관적이고 공정한 도덕에 근거해 판단하는 이성적 역량을 키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