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 류시화
1판1쇄, 2019.03.05, 도서출판 더숲, 사전예약구매, 20190305~
여러 이야기 할 필요가 없다
단, 하나!
나의 판단과 생각으로 그 누구도, 그 무엇에도 덮어 씌워서 보지 말자!
다 그 나름의 이유가 있고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안다고 알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항상 하는 실수 아닌 실수들을 일깨우게 하는 책이었다.
그 누구도 다른 이에게 단정지을 수 없다.
"신이 쉼표를 넣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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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작가는 이 신관처럼 이야기 전달자의 숙명을 짊어진 사람이 아닐까 자는 생각합니다. 늘 새롭고 재미있고 깨달음과 의미가 담긴 이야기를 들려줘야만 하는. 그래서 독자가 첫 번째 이야기를 읽고 나면 그 다음 이야기도 읽고 싶게 만들어야만 하는.(7쪽)
경험을 통해 스스로 가짜와 진짜를 알아보는 눈을 갖는 일은 어떤 조언보다 값지다.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자신의 판단력을 갖게 된 사람은 남을 의심하거나 절망하느라 삶을 낭비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길을 갈 뿐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그 길에 이르는 과정을 섣부른 충고나 설익은 지혜로 가로막지 말아야 한다. 경험하지 않고 얻은 해답은 펼쳐지지 않은 날개와 같다.
삶의 문제는 삶으로 풀어야 한다. (22쪽)
삶은 설명을 듣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다. 경험은 우리 안의 불순물을 태워 버린다. (24쪽)
'새는 날아서 어디로 가게 될지 몰라도 나는 법을 배운다' (25쪽)
나도 아프지만 "당신은 괜찮아요?" 하고 묻는 이가 바로 융이 말한 운디드 힐러, 상처 입은 치유자다
치유는 파도로도 온다. 파도는 쓰러뜨리기도 하지만 다시 쳐서 일어나게도 한다. (39쪽)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고통은 추락이 아니라 재탄생의 순간이고 새로운 여행의 시작이다. 가톨릭에서는 이 고통을 펠릭스쿨파 '행운의 추락'이라고 표현한다. 상처가 구원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42쪽)
만약 우리가 전체 그림을 볼 수 있다면, 전체 이야기를 안다면, 지금의 막힌 길이 언젠가는 선무이 되어 돌아오리라는 것을 알게 될까? 그것이 삶의 비밀이라는 것을.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은 지나간 길이 아니라 지금 다가오는 길이다. (57쪽)
삶이 때로 우리의 계획과는 다른 길로 우리를 데려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길이 우리 가슴이 원하는 길이다. 파도는 그냥 치지 않는다. 어떤 파도는 축복이다. 머리로는 이 방식을 이해할 수 없으나 가슴은 안다.(59쪽)
페르시아의 시인 잘랄루딘 루미는 썼다.
이 문제 많은 세상을
인내심을 가지고 걸으라.
중요한 보물을 발견하게 되리니
그대의 집이 작아도, 그 안을 들여다보라
보이지 않는 세계의 비밀들을 찾게 되리니
나는 물었다.
'왜 나에게 이거밖에 주지 않는 거죠?'
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이것만이 너를 저것으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 (63~64쪽)
라팅엉에서 레푸기움은 '피난처, 안식처'의 의미이다. 원래 레푸기움은 빙하기 등 여러 생물 종이 멸종하는 환경에서 동식물이 살아남은 장소를 말한다. 빙하기 때 살아남은 생물들처럼 자신의 존재를 잃지 않을 수 있는 곳, 그 곳이 바로 레푸기움인 것이다. (82쪽)
[기억, 꿈, 회상]에서 융은 말한다.
"사람들은 점점 커져 가는 부족감, 불만족, 불안 심리에 떠밀려 새로운 것을 향해 충동적으로 돌진한다. 현재 가지고 있는 것으로 살지 않고 미래가 약속해 주는 것들에 의지해 살아간다. 모든 좋은 것이 더 나쁜 대가를 치르고 얻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눈부신 과학의 발견이 우리에게 재앙을 가져온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 (85쪽)
신은 우리의 말을 들음으로써가 아니라 행위를 바라봄으로써 우리를 신뢰한다. 내가 설명하지 않는 것을 내 삶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에서는 '코람 데오'를 이야기한다.. 즉 '신 앞에 선 단독자인 너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이다. 신 앞에서는 어떤 가면으로도 본연의 모습을 숨길 수 없기 때문이다. (106쪽)
'나'의 품사는 흐르는 강처럼 순간순간 변화하는 동사이다. 나는 '나의 지난 이야기 my story'가 아니라 이 순간의 '있음 i am'이다.
만약 내가 '시인'이라는 호칭을 존재의 고정된 틀로 지니고 다닌다면 그것은 죽은 명사가 된다. 죽음만이 유일하게 동사가 될 수 없는 고정 명사이다. 내가 시인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사람을 만날 때 오히려 나는 자유로움을 느낀다. 오직 모름과 모름일 때 존재와 존재로 마주하는 일이 가능하다. 순수한 있음과 순수한 있음으로(121쪽)
미국 시인 찰스 부코스키는 썼다.
"무엇인가를 시도할 것이라면 끝까지 가라. 그러면 너는 너의 인생에 올라타 완벽한 웃음을 웃게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훌륭한 싸움이다. " (140쪽)
인간관계에도 가지치기가 필요하다. 훌륭한 정원사는 어느 가지가 나무에 유익하고, 어느 가지가 단지 자양분을 빼앗을 뿐인지 구분할 줄안다. 가지치기 안 된 나무가 과수원을 망가뜨리 듯 정리되지 않은 관계는 인생을 고갈시키고 불만족과 고통의 원인이 된다. 고통은 우리를 떠나는 것들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을 떠나 보내지 못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관계의 가지치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163쪽)
불교에서 말하는 '무상'은 '덧없고 영원하지 않으니 집착하지 말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영원하지 않음을 깨달음으로써 지금 이 순간 속에 있는 것을 소중히 여기라'는 뜻이다. '영원하지 않음'을 우리가 통제하려고 하지 않을 때 마음은 평화롭다 (168-169쪽)
'나무에 대해서든 사람에 대해서든 한 계절의 모습으로 전체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나무와 사람은 모든 계절을 겪은 후에야 결실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힘든 계절만으로 인생을 판단해선 안 도니다. 한 계절의 고통으로 나머지 계절들이 가져다 줄 기쁨을 파괴하지 말아야 한다. 겨울만 겪어 보고 포기하면 봄의 약속도, 여름의 아름다움도, 가을의 결실도 놓칠것이다' (183-184쪽)
메시아가 장님과 귀머거리를 치료하고 죽은 자도 살려 냈지만 불평꾼을 치료했다는 일화는 어디에도 없다는 말이 있다.(188쪽)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을 잘 모른다는 것과 동의어일 때가 많다. 누군가를 안다고 믿지만, 그 사람에 대한 나의 생각과 감정을 믿는 것이다. 또한 누군가를 좋아하고 실어하지만, 사실은 나의 판단과 편견을 신뢰하는 것이다. (206쪽)
만년에 자신을 찾아온 작가 지망생 아놀드 새뮤얼슨에게 헤밍웨이는 말하고 있다.
"일단 쓰라. 일단 써 보라. 그렇게 낙심하지 말고, 자네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수ㅐㅂ게 낙심하는 사람이야. 그것이 천재의 징후일 수도 있지만 극복해야 할 과제이기도 해" (224쪽)
미르자 칼리브의 시
내 시는 음악도 아니고 악기도 아니다
내 시는 나 자신이 부서지면서 내는 소리 (242쪽)
왜 붙잡으려고 하는가? 떠나는 것은 떠나게 하고, 끝나는 것은 끝이게 하라. 결국 너의 것이라면 언젠가는 네게로 돌아올 것이니. 고통은 너를 떠나는 것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떠나 보내지 못하는 네 마음에 있다. 놓아 버려야 할 것들을 계속 붙잡고 있는 마음에.(244쪽)
시인 루미는 말한다.
'그대가 사랑하는 것이 그대를 끌어당길 것이다. 그것을 말없이 따라가라. 그대는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신이 배치해 둔 표식들에 귀를 기울이라. 그러면 길을 발견할 것이다. 나무에 새겨진 표시를 따라 방향을 정하듯. 불분명하게 뒤엉킨 삶의 미로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일상 속 어디에나, 타인과의 대화나 꿈 속에도 삶의 방향을 가리키는 작은 표지판들이 있따. 모두가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찾는 것이 사실은 우리를 찾고 있다. (24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