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그래피/박노해 시

H311. 늘 단정히 _ 박노해

해아심이 2022. 8. 15. 12:23

 

늘 단정히

                                            박노해

 

초등하교 입학식 날

낡은 옷을 빨아서 풀을 먹이고

숯불 다리미로 다려 입혀주며

어머니가 당부하셨다. 

 

아들아, 오늘부터 넌 어엿한 학생이다

늘 마음을 밝게 하고 시선을 바로 해야 쓴다

아비 없는 자식이라고 몸가짐과 옷차리마저

단정치 못하면 그건 네 탓이다

가난과 불운이 네 눈빛을 흐리게 하지 말거라

이제 너는 스스로 헤쳐 갈 창창한 학생이다

 

그날 아침 혼자서

타박타박 황톳길을 걸어 입학식에 가던 나는

학생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걸어 나가던 나는

떨리고도 환한 마음으로 입술을 꼬옥 물었다

 

그날 이후 아무리 험한 조건에서도

나는 어머니의 그 말을 떠올려왔다

공장에서도 군대에서도 수배 길과 감옥에서도

내 처소와 살림과 옷차림을 단정히 하고

 

밝은 마음과 미소를 잃지 않고 시선을 바로 하여

사람과 세상을 정면으로 바라보고자 노력했다

밥을 먹을 때 말을 할 때도 글씨를 쓸 때도

걸음을 걸을 때도 늘 반듯이 하고자 애써왔다

 

가난하고 힘이 없고 고달프다하여

내가 할 수 있는 내면의 빛과 소박한 기품을

스스로 가꾸지 않으면 나 어찌 되겠는가

내 고귀한 마음과 진정한 실력과 인간의 위엄은

어떤 호화로운 장식과 권력과 영예로도

결코 도달할 수 없고 대신할 수 없으니

 

늘 단정히

늘 반듯이

늘 해맑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