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 | 한승석 & 정재일 (가사, 동영상)
빨래 | 한승석 & 정재일
바리가 부모 하직하고 길을 나서 서천 꽃밭을 찾아갈 제,
어느 강가에 당도하니 어떠한 할미 하나, 빨래 나와 앉았는디,
어따, 그 할미 쉰내 나는 빨래를 태산같이 쌓아놓고서는,
궁둥이를 우아래로 움죽움죽, 들썩들썩,
빨래는 하는둥마는둥 장탄식만 늘어지는고나.
제나 나 헤도 산이로구나
목화 따다 무명 짓기는 어느 잡놈의 소행이며,
누에 쳐서 비단 뽑기는 어느 시러베 잡년의 지랄이냐
들짐승도 날짐승도 입고 나온 옷 한 벌로
천지 간에 활개치며 잘도 살아간다마는
어쩌자고 옷이 생겨나 이 고생이 웬 말인가
제나 나 헤도 산이로구나
“여보시오, 할멈. 서천 꽃밭 가는 길이 어느 쪽이오?”
“서천 꽃밭? 알기는 안다마는, 갈차줘도 너는 거기 못 가니라.”
“일러만 주오. 가는 것은 내 알아서 갈 테니.”
“거 맹랑헌 것두 다 본다. 어른이 못 간다면 그런 줄 알제.”
“꼭 가야 하니 그러지요. 죽어도 나는 서천 꽃밭에 가야 돼요.”
“죽으면, 안 가고 잪어도 가는 데니라, 거기가.”
“아이, 참! 사람 애간장 좀 그만 태우고 빨리 가르쳐주시오.”
“허 참, 생긴 것두 참 고집씨구 말 안 듣게 생겼다. 그려, 정히 소원이먼 갈차는 주는디—”
“참말이오?”
“요 빨래 다 해 주먼 갈차주마.”
“참, 세상에 공짜 없네요?”
“고것을 인자 알었냐? 자, 인자 빨래를 허되, 흰 빨래는 검게 빨고 검은 빨래는 희게 빨어라이.”
“그것을 말이라고 해요, 지금?”
“싫으면 말고.”
“이런 오그라질 할망구.”
“뭐여?”
“아니요, 아니에요. 할 게요, 해요.”
“그럼 히봐, 얼른 히봐!”
바리가 퍼버리고 앉아 투덕투덕 빨래를 허는디…….
사는 일 구질구질 냄새 나고 더럽다고 울지 마라 아이야, 괜찮다, 그럼 괜찮고 말고.
살다보면 얼룩덜룩 때도 묻는 것. 살아있으니 이럭저럭 때도 타는 것.
아히야 나니누 나니노 나니나 나니너 나니나 빨래야 빨래도 많기도 많다.
뜬 세상 홍진 속에, 이리 펄럭 저리 펄럭, 깃발처럼 나부끼다, 사람 속에 부대끼다,
후줄근히 돌아오는 이 저녁, 세상의 그 모든 빨래여, 때에 젖은 마음이여.
오너라, 드넓은 강가, 호젓한 개울가, 흐르는 맑은 물, 내 그 앞에서 너를 기다리느니,
두 팔도 두 다리도 동동 걷어 부치고서 씻어보자 아이야
묵은 때 묵은 마음 우리네 묵은 삶도
비누칠해 주물주물 빨아 보자. 맑은 물에 스리슬렁 헹궈나 보자.
아히야 나니누 나니노 나니나 나니너 나니나 빨래야 빨래도 많기도 많다.
세상에 몸을 받아 첫 울음 우는 아이, 붉은 몸에 비린 핏물 닦아내던 무명수건,
젖 토한 갓난애기 배내옷 저고리, 침 묻은 턱받이, 똥오줌 기저귀,
온 종일 뛰놀던 아이의 운동화며, 커피 타다 얼룩져버린 미스 김 스커트,
팀장 호통에 주눅이 들어 온종일 진땀을 질질질 흘리던 불쌍한 김대리의
목 깃이 누래진 와이셔츠, 삼십삼 층 아파트 공사장에 황씨는 일당잡부,
온종일 벽돌 지고 위로 아래로 오르내려 흘린 땀 소금 되어 하얗게 배인 작업복,
아래층 신혼부부 기나긴 밤 얼싸 안고 빙글빙글 돌아가며 흘리는 땀, 풋풋이 배어든 침대 시트,
건넛집 훈이녀석 간밤에 꿈꾸다 실례했구나, 세계지도 노오랗게 그려놓은 이불,
골목 안 쪽방에 오래 혼자 앓는 박노인, 오래 같이 앓던 이불
아히야 나니누 나니노 나니너 나니나 빨래야 빨래도 많기도 많다.
빨래야 빨래도 많기도 많다. 빨래야 빨래도 많기도 많다.
검은 옷, 하얀 옷, 빨간 옷, 파란 옷, 노란 옷, 초록 옷, 보라색 옷
새 옷, 헌 옷, 산 놈, 얻은 놈, 가지각색, 형형색색, 온갖 빨래.
윗도리로 볼작시면, 런닝구, 부라자, 블라우스, 와이샤쓰, 배꼽 티, 폴로 티,
잠바, 오바, 마이, 조끼, 넥타이, 목도리, 롱 코트, 반 코트, 원피스, 투피스, 쓰리피스,
아랫도리로 넘어간다. 빤쓰, 고쟁이, 속치마, 겹치마, 홑치마, 열두 폭 주름치마,
한 뼘 미니 스커트에, 칠부 바지, 반바지, 배바지,
핫 팬츠, 똥싼 바지, 삼베바지, 솜바지, 핫바지, 양복바지,
얼금얼금 스타킹, 맵시 좋은 외씨버선, 나달나달 구멍 난 양말, 구두, 운동화, 등산화.
아히야 나니누 나니노 나니나 나니너 나니나 빨래야 빨래도 끝없이 난다.
비지땀, 식은땀, 피고름, 살비듬, 누우런 흙먼지, 시커먼 기름때,
시큼한 땀냄새, 고릿한 발냄새, 비린내, 지린내, 노린내, 구린내,
사느라 부대껴 갖은 때에 절어, 사느라 자욱이 온갖 냄새 절어,
거리로 나서는 그대, 집으로 돌아오는 그대,
그대가 벗어놓은 한 겹의 허물, 그대가 묻혀오는 뜬 세상 먼지,
얼룩덜룩, 구질구질, 시큼시큼, 꾸덕꾸덕, 때에 절고 냄새 배어 남루해도,
아이야 괜찮다, 괜찮고 말고. 먼지 자욱한 뜬 세상, 허물 없는 목숨이 어디 있으랴.
사는 일 구질구질 냄새 나고 더럽다고 울지 마라 아이야, 괜찮다.
살다 보면 얼룩덜룩 때도 묻는 것. 살아있으니 이럭저럭 때도 타는 것.
오늘은 볕도 좋고 바람결도 선선해라.
찐득한 원망도 찌들은 설움도 팍팍한 가슴도 꽉 막힌 세상도
방망이 탕탕 쳐 맑은 물에 훌렁 헹궈 주물주물, 바락바락, 꼭꼭 짜고, 탈탈 털어
노란 볕에 잠시 잠깐 널어나 보세. 저 바람에 한들한들 말려나 보세.
아히야 나니누 나니노 나니너 나니나 너 나아 -----
빨래야 빨래도 참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