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허송세월 | 김훈
해아심이
2024. 7. 25. 15:31
내가 미워했던 자들도 죽고 나를 미워했던 자들도 죽어서, 사람은 죽고 없는데 미움의 허깨비가 살아서 돌아다니니 헛되고 헛되다. (35쪽)
사람이 울 때, 소리를 삼키고 눈물만 흘리는 억눌린 울음을 '읍'이라 하고, 소리를 내 지르며 슬픔의 형식이 드러나는 울음을 '곡'이라 하고, 눈물도 흘리고 소리도 나는 그 중간쯤을 '체'라고 한다는데, 이날 나의 마당에서 울고 간 새의 울음은 이런 어지러운 말을 모두 떠나서 몸 저체를 공명통으로 삼아 소리를 토해 내는 울림이었고, 이런 울림은 모음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자음이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모음은 슬픔의 서사구조를 용해해서 울림으로 울리게 하는데, 이 울림은 슬퍼하는 사람의 마음을 맑게 하는 정화 기능을 갖는다. (73쪽)
꽃들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 피는 것이 아니라 저 자신의 운명을 펼쳐 보이려고 핀다. 꽃들의 운명은 언제나 완성되어 있고, 이것이 꽃들이 누리는 자유의 발현이다(83쪽)
냄새는 기호화할 수 없고 개념화할 수 없고, 구조나 조직으로 계통화할 수 없다. 그래서 냄새는 사상이나 예술이 되지 않는다. 기억속에 남아 있는 냄새는 내 생애의 냄새이고, 내가 살아온 시간의 냄새다. (32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