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색을 싫어하는 딸기가 있었다 | 진성진

해아심이 2025. 1. 20. 11:28

*시인은 20여년간 다닌 동물병원의 원장님이시다. 

 

해바라기(13쪽)

 

문득 오소서

지나가다 들르듯 오소서

기다리는 마음 아랑곳없이

무심이 오소서

 

알알이 영그는 씨앗을 세고

길어지는 밤 길이를 재고

찬 서리 냉기를 헤아리며

매일이 같지만 어제와 같지 않을 

오늘을 기다립니다

 

문득 오시는 발걸음에도

스치는 오시는 발걸음에도

무심히 오시는 발걸음에도

 

태양을 향한 그리움을 새긴 얼굴을 

결코 떨구지 않으렵니다. 

 

낙엽(20쪽)

 

나무의 변심이다

 

여름의 뜨거움에

모든 열정을 태운

나무의 변심이다

 

아름답던 몸짓의 식상함

늙음을 지켜볼 까닭없는

나무의 변심이다. 

 

아무리 밀쳐도

나무 곁을 

맴도는 미련

 

바람의 다독임에

그제야 돌이키는

그 걸음이 아련하다

 

낙엽을 보면 

슬픈 마음이 드는 것

순정을 다한 탓이리라.

 

 

고향 가는 길(중, 30-31쪽)

 

세월은 그리움을 가져간다는 거짓말,

세우러은 함께 못한 시간만큼

그리움을 쌓아 두었다. 

 

그리움은 

웅덩이를 만들고 골을 깊게 파서

슬픔으로 가득 채우고

고향 가는 길을 막는다

객들은 되뇌인다

 

"고향은 슬픔이다"

 

억새(34-35쪽, 중)

 

바람이 길을 내고 

밑동을 파고들어

뿌리조차 숨길 수 없을지라도

부다 꺾이지만 말아다오.

 

빨간색을 싫어하는 딸기가 있었다(50-51쪽, 중)

 

새벽녘

부리런한 농부의 바구니로

사라지게 하는

빨갛게 된다는 건

어른이 된다는 건

이별이었기에

 

이별 뒤(62-63쪽 중)

 

소중한 것을 잃는다는 건

정말 소중한 것과 헤어진다는 건

이별한 기억을 잊기까지

살아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