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사는 인생, 누구나 서툴지 | 나태주

해아심이 2025. 5. 15. 11:03

초판 5쇄 2023.10.16

 

 나태주님의 시로 이루어진 줄 알았는데...

다른 시인의 좋은 시를 같이 엮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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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호에서 - 나희덕

 

얼어붙은 호수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다.

불빛도 산 그림자도 잃어 버렸다

저 단단함의 서슬만이 빛나고 있을 뿐

아무것도 아무것도 품지 않는다

헛되이 던진 돌멩이들,

새떼 대신 메아리만 쩡 쩡 날아오른다

 

네 이름을 부르는 일이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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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 연인 - 정끝별

 

팔이 엇어 껴안을 수 없어

다리가 짧아 도망갈 수도 없어

 

배도 입술도 너무 불러

너에게 깃들 수도 없어

 

앉지도 눕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 껴안고 서 있는 

여름 펭귄 한 쌍

 

밀어내며 끌어 안은 채

오랜 세월 그렇게

 

서로를 녹이며

서로가 녹아내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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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질수록 혼자가 되라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사랑에 빠진 사람은

혼자 지내는 데 익숙해야 한다

사랑이라고 불리는 그것

두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그것은 사실

홀로 있어야만 비로소 추운해져

마침내 완성되는 것이기에

사랑이 자기감정 속에 든 사람은

사랑으로 매일 자신을 갈고 닦을 수 있다

서로에게 부담스러운 짐이 되지 않고

그 거리에서 한없이 자유로울 수 있는 것

사랑에 빠질수록 혼자가 되라

두 사람이 겪으려 하지 말고

오로지 혼자가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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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묻는다 - 이산하

 

꽃이 대충 피더냐

이 세상에 대충 피는 꽃은 하나도 없다

꽃이 소리 내며 피더냐

이 세상에 시끄러운 꽃은 하나도 없다

꽃이 어떻게 생겼더냐

이 세상에 똑같은 꽃은 하나도 없다

꽃이 모두 아름답더냐

이 세상에 아프지 않은 꽃은 하나도 없다

그 꽃들이 언제 피고 지더냐

이 세상의 모든 꽃은

언제나 최초로 피고 최후로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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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길은 없다 _ 베드로시안

 

아무리 어둔 길이라도

나 이전에 그 누군가는

 

아무리 가파른 길이라도

나 이전에 그 누군가는

 

아무도 걸어간 적 없는

그런 길은 없다. 

 

나의 이 어두운 시간이

비슷한 여행을 하는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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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는 말했습니다 '탐욕의 반대는 무용이 아니라 만족입니다'(1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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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혹은- 조병하

 

늘, 혹은 때때로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생기로운 일인가

 

늘, 혹은 때때로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카랑카랑 세상을 떠나는

시간들 속에서

 

늘, 혹은 때때로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인생다운 일인가

 

그로 인하여 

적적히 비어 있는 이 인생을

가득히 채워가며 살아갈 수 있다는 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가까이, 멀리, 때로는 아주 멀리

보이지 않는 그 곳에서도

끊임없이 생각나고 보고싶고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나마 지금, 내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명확한 확인인가

아, 그러한 네가 있다는 건

얼마나 따사로운 나의 저녁노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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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그러냐_나태주

 

나는 너 때문에 산다

 

밥을 먹어도

얼른 밥 먹고 너를 만나러 가야지

그러고

잠을 자도

얼른 날이 새어 너를 만나러 가야지

그런다

 

네가 곁에 있을 때는 왜

이리 시간이 빨리 가나 안타깝고

내가 없을 때는 왜

이리 시간이 더딘가 다시 안타깝다

 

멀리 길을 떠나도 너를 생각하며 떠나고

돌아올 때도 너를 생각하며 돌아온다

오늘도 나의 하루해는 너 때문에 떴다가

너 때문에 지는 해이다

 

너도 나처럼 그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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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 _ 고영민

 

나는 내가 좋습니다 당신도

당신이 좋습니까

 

낮에 당신은 당신에게 뭐라 말합니까

밤에 당신은 당신에게 

뭐라 말합니까

 

오늘 당신에게 내 생각이 잠깐 

다녀갔습니까

오늘 나에게 당신 생각이

잠깐 다녀갔습니까

 

자기 꼬리를 물려고 빙글빙글 도는

강아지처럼

어둔 하늘 아래 천천히 시드는

방앗잎들처럼

 

가볍게 오고 싶지 않습니다, 가볍게

가고 싶지 않습니다

 

정말입니까

나는 내가 좋습니다 당신도

당신이 좋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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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를 _ 나태주

 

내가 너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는 몰라도 된다

 

너를 좋아하는 마음은

오로지 나의 것이ㅛ

나의 그리움은

나 혼자만의 것으로도

차고 넘치니까.....

 

나는 이제 

너 없이도 너를 

좋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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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정사(草上靜思) _ 이형기

 

풀밭에 호올로 눈을 감으면

아무래도 누구를

기다리는 것 같다

 

연못에 구름이 스쳐가듯이

언젠가는 내 가슴을 고이 스쳐간

서러운 그림자가 있었나 보다

 

마치 스스로의 더운 입김에

모란이 뚜뚝 져버리듯이

한없이 나를 울렸나 보다

 

누구였기에

누구였기에

아아 진정 누구였기에...

 

풀밭에 호올로 눈을 감으면

어디선가 단 한 번 만난 사람을

아무래도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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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지붕 위로 _ 폴 베를렌

 

하늘은 지붕 위에서 너무도 푸르고 조용하구나

종려나무는 지붕 위에서 잎사귀 일렁이고

 

종은 하늘 가운데에서 부드럽게 울리고

새는 나무 위에서 구슬피 울고

 

아, 삶은 바로 저기에,

단순하고 평온하게 있는 거구나

이 평화로운 웅성거림은

저기 저 마을에서 들려오는 것

 

뭘 했니, 오 너말이야, 바로 여기서

계속 울고만 있는

말해봐, 뭘했니, 너, 바로 여기 있는

네 젊을 가지고 뭘 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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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_ 나태주

 

내가 외로운 사람이라면

나보다 더 외로운 사람을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

 

내가 추운 사람이람면

나보다 더 추운 사람을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

 

내가 가난한 사람이라면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

 

더욱이나 내가 비천한 사람이라면

나보다 더 비천한 사람을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때때로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하게 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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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그란 길로 가다 - 박노해

 

누구도 산저에 오래 서 있을 수는 없다

누구도 골짜기에 오래 머물 수는 없다

 

삶은 최고와 최악의 순간들을 지나

유장한 능선을 오르내리며 가는 것

 

절정의 시간은 짧다

최악의 시간도 짧다

 

환희의 날들은 짧다

고난의 날들도 짧다

 

돌아보면

좋을 때도 순간이고

힘든 때도 순간인 것을

 

그러니 담대하라

어떤 경우에도 진실된 자신을 잃지 마라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위엄을 잃지 마라

 

긴 호흡으로 보면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고

나쁜 게 나쁜 것이 아닌 것을

 

삶은 동그란 길로 돌아 나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