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적 체질 | 류근
문화과지성 시인선 375, 2016년 9월 초판 12쇄
p.3
시인의 말
진정한 지옥은 내가 이 별에 왔는데
약속한 사람이 끝내 오지 않는 것이다.
사랑한다고,
그립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p.12
獨酌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믿는 사람은
진실로 사랑한 사람이 아니다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사람은
진실로 작별과 작별한 사람이 아니다.
진실로 사랑한 사람과 작별할 때에는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이승과 내생을 깨워서
불러도 돌아보지 않을 사랑을 살아가라고
눈 감고 독하게 버림 받는 것이다.
단숨에 결별을 이룩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아
다시는 내 목숨안에 돌아오지 말아라
혼자 피는 꽃이
온 나무를 다 불지르고 운다.
p.16
벌레처럼 울다 中
나는 썩지 않기 위해 슬퍼하는 것이 아니다
살아서 남김없이 썩기 위해 슬퍼하는 것이다.
p.24
폭설 中
그대 떠난 길 지워지라고
눈이 내린다
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져버리라고
사나흘 눈 감고 젖은 눈이 내린다
p. 48
상처적 체질 中
내가 간직한 상처의 열망, 상처의 거듭된
폐허,
그런 것들에 내 일찍이
이름을 붙여주진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또 이름 없이
다친다
상처는 나의 체질
어떤 달콤한 절망으로도
나를 아주 쓰러뜨리지는 못하였으므로
p.64
평화로운 산책 中
하여간 나는 지금 걷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날들의 음계를 더듬으며
삭정이 같은 추억이라도 한 순간
독하게 끌어 안아보는 것이다
p. 95
極地 中
살아오는 동안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로부터 거의 언제나
일방적으로 버림받는 존재였다.
...
그러나 마침내 술자리가 끝났을 때
결국 취한 나를 데리고 어느 바닥에든 데려가
잠재우고 있는 것은 나였다.
더 갈 데 없는 혼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