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적 체질 | 류근

해아심이 2017. 7. 26. 17:12


 문화과지성 시인선 375, 2016년 9월 초판 12쇄



p.3

시인의 말

        진정한 지옥은 내가 이 별에 왔는데

        약속한 사람이 끝내 오지 않는 것이다.

        사랑한다고,

        그립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p.12

獨酌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믿는 사람은

진실로 사랑한 사람이 아니다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사람은

진실로 작별과 작별한 사람이 아니다.


진실로 사랑한 사람과 작별할 때에는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이승과 내생을 깨워서

불러도 돌아보지 않을 사랑을 살아가라고

눈 감고 독하게 버림 받는 것이다.

단숨에 결별을 이룩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아

다시는 내 목숨안에 돌아오지 말아라

혼자 피는 꽃이

온 나무를 다 불지르고 운다.


p.16

벌레처럼 울다 中


나는 썩지 않기 위해 슬퍼하는 것이 아니다

살아서 남김없이 썩기 위해 슬퍼하는 것이다.


p.24

폭설 中


그대 떠난 길 지워지라고

눈이 내린다

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져버리라고

사나흘 눈 감고 젖은 눈이 내린다


p. 48

상처적 체질 中


내가 간직한 상처의 열망, 상처의 거듭된

폐허,

그런 것들에 내 일찍이

이름을 붙여주진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또 이름 없이

다친다

상처는 나의 체질

어떤 달콤한 절망으로도

나를 아주 쓰러뜨리지는 못하였으므로


p.64

평화로운 산책 中


하여간 나는 지금 걷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날들의 음계를 더듬으며

삭정이 같은 추억이라도 한 순간

독하게 끌어 안아보는 것이다


p. 95

極地 中


살아오는 동안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로부터 거의 언제나

일방적으로 버림받는 존재였다.

...


그러나 마침내 술자리가 끝났을 때

결국 취한 나를 데리고 어느 바닥에든 데려가

잠재우고 있는 것은 나였다.


더 갈 데 없는 혼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