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씨를 심어요
박노해
지난 가을
그대가 보내준 편지봉투에
꽃씨를 받아 넣었죠
눈 내리는 겨울밤에
책장 선반 구석에서
봉투 안의 꽃씨들이
소곤소곤 속삭이는 소리에
몸을 뒤채며 봄을 기다렸죠
첫 봄비가 내리고
그대가 보내준 편지를 다시 읽으며
봉투에 간직해온 꽃씨를 심어요
내가 여기 태어나
지구에서 가장 좋아하는 건
꽃과 나무, 그리고 그대이죠
비바람과 눈보라 속에서도
원망하지도 않고 포기하지도 않고
최선을 다해 꽃과 향기를 내어주고
한 생의 결실을 이 작은 꽃씨에 담아
긴 겨울날을 우리 함께 걸어왔죠
좋지 않은 일들이 한꺼번에 오고
좋지 않은 자들이 봄을 밟고 와도
눈 녹은 땅에 꽃씨를 심어요
지구에서 보낸 한 생의 길에서
곧고 선한 걸음으로 꽃을 피워온 그대
사랑이 많아서 슬픔이 많았지요
사랑이 많아서 상처도 많았지요
그래도 좋은 사람에게 좋은 일이 오고
어려움이 많은 마음에 좋은 날이 오고
눈 녹은 땅에 씨 뿌려가는 걸음마다
봄이 걸어오네요
꽃이 걸어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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