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을 다했다는 말이 저 바닥을 움켜쥔,

붉은 손바닥 같은 거였으면 좋겠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바람이

나이테를 그리다 젖은 불씨가 된 바람이

바람으로는 아예 죽지도 못하는 바람이

닿을 곳 없어 바람으로만 있는 바람이

 

당신이 뱉어낸 한솜보다 못한 것이어서

가을은 그저 바람을 견딘 색

 

눈시울이 뜨거워지면

단풍을 더어, 상처가 무늬로 빛날 거라고 믿었던 적이 있었지만

눈물이란 때로 색으로 은둔하는 법,

공들여 슬플 수 있다면 감정은 감당으로 이해되었으니

 

손바당을 비울수록 텅 비워진 거리,

 

당신은 나무를 사랑하는 법을 배웠지만

나무가 당신은 사랑하는 법은 배우지 못해서

 

너무 쉽게 계절을 사람으로 생각했는지도

 

사람의 온기로 물드는 계절이란

무너지거나 무디어지는 색

 

오지 않는다, 오지 않으므로

가을은 색을 지우기 위해 빗소리를 키웠으니

 

진심이 머무르기에는

너무 붉도록 젖은 손바닥,

 

나는 당신이 아파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색이었으므로

이 가을을 바닥으로 움켜쥐고도

 

끝내 색으로만 머물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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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 1쇄 2026.7.6

 

 

 

작아진다는 건 초록이 무성하도록

나에게 할 말이 많아진다는 거

 

그러나 스스로는 죽일 수 없는

 

지옥이란 아주 울 수는 없는 일

저녁의 이목구비를 들키지 않는 일

아침의 커튼을 들추지 못하는 일

 

어두워지는,

 

진심에 오래 답하는 버릇이 생겼다(조금 우는 일 중, 17쪽)

♣

 

소경의 눈에 세 들어 사는 것 같기도 했다

 

봉이지 않는다는 것

이미 죽어도 되는 세계에 도래했다는 것

 

어둠을 각오한 밤이 계속되고 있었다.(눈물이 검어지는 기원 중, 20쪽)

♣

 

우는 대신 걸음을 선택하는, 비밀들이 있나요?

슬픔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발자국을 지우듯이 바삐 걷도 있나요?(물속의 산책자 중, 22쪽)

♣

 

발자국을 밀어 올리는 것은 길이 아니라

곰의 숨소리, 으스스 별자리가 돋는 것도

제 등허리를 바위에 긁은 까닭이다(나는 문경새재의 저녁으로 눕는다 중, 26쪽)

♣

 

아버지가 되자, 물빛으로 살고 싶어(사막을 건너는 표정 중, 46쪽)

♣

 

젖은 발을 말리는 물오리를 봅니다

날개가 된다는 것은

바람 한 줌을 허파에 가두는 일입니다(한고비의 계절 중, 70쪽)

♣

 

안개는 허공에 매달린 자의 실족사다(안개의 장례식 중, 88쪽)

♣

 

내뱉는 숨마다 회색 별들이 되어 서로를 가로막는 성벽

 

그 틈에서 시인은 공기의 얇은 살을 불어 올린다

자욱한 연기 속에서 건져낸 투명한 문장 하나

 

검게 저문 불씨가 재의 무덤을 개어낼 때

둥근 말들은 무디어 가는 허공에 숨구멍을 낸다(흡연실의 비눗방울 중, 91쪽)

♣

 

굶주린 무덤을 태우고도 불씨 가득한 침묵,

발설할 수 없는 뻘발에도

소금을 키우는 그림자가 있다네(눈꺼풀이 무거워지는 버릇 중, 100쪽)

♣

 

주머니마다 돌이 흥건한가요

피맺힌 것들이 돌이 된다는 말을 이해하는 밤인가요(돌의 쓸모 중, 104쪽)

 

벗어나려고 애쓰는 날개가 실은,

그토록 빛을 가두는 얼음이었지만

어쩌면 돌이란 최초의 냉정으로 얼어붙은 수모일지 모르겠어요

돌에 맞아 죽을 수는 있어도 돌을 던질 수 없어

피투성이가 빚은 달(돌의 쓸모 중, 104쪽)

♣

 

배고파요, 이것은 문장이 아니라 피부인데 빗소리가 번지는 쪽은 안쪽이에요. 오늘 저녁도 물집을 터뜨리고파 먼저 손이 가는 건 오이지였죠. 햇빛에 말라비틀어진 맛이란 하룻밤 묵어간 애인 같은 것인데, 혀끝은 마르도록 축축한 감정이 맺히죠(다정한 병 중, 108쪽)

♣

 

진심이 묽은 눈시울을 들킨 건 김치찌개가 식어갈 무렵이었다. 서로의 눈시울을 엮어도 피가 돌지 않는 마음에는 소주 한잔이 전부였다. 같은 온도를 가지고 있으면서 외면하는 대작이라니, 텅 빈 술잔을 마주할 때마다 안쪽을 비추는 눈동자(그대로의 진심, 110쪽)

♣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바람이

나이테를 그리다 젖은 불씨가 된 바람이

바람으로는 아예 죽지도 못하는 바람이

닿을 곳 없어 바람으로만 있는 바람이

 

당신이 뱉어낸 한숨보다 못한 것이어서

가을은 그저 바람을 견딘 색(진심의 색 중, 11쪽)

♣

 

사람의 온기로 물드는 계절이란

무너지거나 무디어지는 색

 

오지 않는다. 오지 않으므로

가을은 색을 지우기 위해 빗소리를 키웠으니

 

진심이 머무르기에는 

너무 붉도록 젖은 손바닥,

 

나는 당신이 아파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색이었으므로

이 가을을 바닥으로 움켜쥐고도

 

끝내 당신의 색으로만 머물러 있다(진심의 색 중, 115쪽)

♣

 

시계가 불판 같다고요. 시간만큼 완벽한 소각장은 없다고요. 쵳ㅁ과 분침과 시침은 다 다른 속을 가리키지만 둥글게 깎인 시간을 선물한다고요 왜 형이 질문한ㄴ데, 내 질문이 참담한 행성을 돌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별자리를 보며 검은 밤을 건너는 사람들은 왠지 옆구리 아픈 사람들 같고, 곁이면서 겉이 되고 말이오(곁 중, 1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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