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부 / 시인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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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에게

 

                            신동엽

 

 

아름다운

하늘 밑

너도야 왔다 가는구나

쓸쓸한 세상세월

너도야 왔다 가는구나

 

다시는

못 만날지라도 먼 훗날

무덤 속 누워 추억하자

호젓한 산골길서 마주친

그날, 우리 왜

인사도 없이

지나쳤던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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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같이

 

                           윤동주

 

 

연륜이 자라듯이

달이 자라는 고요한 밤에

달같이 외로운 사랑이

가슴 하나 뻐근히

연륜처럼 피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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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화에게

 

                               정호승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그림자도 외로원서 하루에 한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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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일

 

                                     김사인

 

이도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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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밤

 

                               나희덕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떤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따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그러나 매양 퍼올린 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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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에서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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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작별이 서툴다

 

                                      류시화

 

나는 작별이 서툴다

헤어지면서 안녕이라고 말하는 것이

바람에 잎을 떠나보내는 나무처럼

그렇게 무심히 '잘 가'하고 말할 순 없을까

꽃의 손을 놓는 가지처럼

'봄이 되면 또 만나'하고 기쁘게 보내 줄 수 없을까

잠시 헤어짐이 영원한 공백이 될지 몰라

작은 기척에도 놀라는 풀잎의 마음으로

얼마나 많은 마지막 말을 입속에 삼켰던가

안녕, 아름다운 세상아

안녕, 짧은 계절 동안의 나의 사랑아

잘 가라, 유서처럼 떠나는 나의 시들아

아무리 연습해도

나는 작별의 말이 서툴다.

 

 

생각해 보았는가

 

                              류시화

 

생각해 보았는가 백일홍이 한 여름에

백 일 동안 꽃을 피우는 것은

그리움 때문이라고

낮달맞이꽃이 씨앗 속에서부터 공들여

흰색 섞은 분홍색을 준비하는 것도

태생적 그리움 때문이라고

수선화의 어린 싹이 미련없이

구근을 찢는 것도

 

되지빠귀가 울대를 떨며 매번 다른 소절로

노래를 시작하는 것도

당신이 다른 별에서 이곳에 온 것도

매듭 같은 그리움 때문이라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누군가를 그리워하듯이

나는 낙타였나 보다

 

                                         류시화

 

나는 낙타였나 보다

세상이 사막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입술 하얗게 갈증 심할 뿐

이따금 발 헛디딘 것이 전부였는데

여기까지 와서 신발 벗어 보니 모래 가득하다

별 밟고 다닌 줄 알았는데

눈썹에 얹힌 후회의 먼지 해를 가리고

일부러 넘어진 건지 삶이 비탈진 건지

아무래도 나는 무르팍에 옹이 박힌

낙타였나 보다

 

나는 담쟁이였나 보다

인생을 벽이라고 여기지 않았는데

깨달음이라든가 진리라든가

더 큰 주제 향해 촉수 뻗어 나간 줄 알았는데

이제 와 보니 간신히 벽 하나 타고 올라가

담 위로 얼굴 내밀었을 뿐

자유로이 행로 넓히며 돌아다녔다 자부했는데

겨우 연두 몇 장 내보였을 뿐

아무래도 나는 남의 어깨에 발돋움하고 살아온

담쟁이넝쿨이었나 보다

 

나는 복화술사의 인형이었나 보다

나만의 어법으로 사람에게 다가간다 믿었는데

가난한 말로 먹고사는 일인극 배우처럼

나의 전 생애가 단지 혼잣말은 아니었을 것인데

물음과 되물음 속에 그저 입술만 움직이며

폐에서 불어 대는 바람 소리

그리움에는 거짓이 없다는데

마냥 타인의 말투 흉내 내며 살아온 건 아닌지

아무래도 나는 갈구하는 입놀림에 불과한

복화술사의 인형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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