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꽃

 

                            김이율

 

아끼지 마라

 

햇살 모아서

겨울에 쓸 생각마라

 

눈 쓸어 담아서

여름에 먹을 생각 마라

 

행복을 저축하지 마라

이자도 없고

내일없다.

 

아까지 마라

오늘의 꽃

오늘 실컷 다 봐도 좋다

 

그래야

네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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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은 차마 못했네

                                         박노해

사랑은 했는데

이별은 못했네

사랑할 줄은 알았는데

헤어질 줄은 몰랐었네

내 사랑 잘 가라고

미안하다고 고마웠다고

차마 이별은 못했네

이별도 못한 내 사랑

지금 어디를 떠돌고 있는지

길을 잃고 우는 미아 별처럼

어느 허공에 깜박이고 있는지

사랑은 했는데

이별은 못했네

사랑도 다 못했는데

이별은 차마 못하겠네

웃다가도 잊다가도

홀로 고요한 시간이면

스치듯 가슴을 베고 살아오는

가여운 내 사랑

시린 별로 내 안에 떠도는

이별 없는 내 사랑

안녕 없는 내 사랑

 

 

** 세월호 7주기 추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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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마음

 

                                        김현승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 아버지의 동포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것들이 간직한 깨끗한 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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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듭을 묶으며

 

                              박노해

 

짐 보따리 단단히 묶어라

매듭은 너무 꽉 묶지 말아라

풀 때를 생각해 날캉히 묶어라

 

사람살이가 그런거다

 

다신 안 볼 것처럼

인연줄 모질게 자르지 마라

언제 어디서 다시 볼 지 누가 안다냐

 

인생살이가 그런거다

 

그때 그때야 일이 목숨 같다지만

지나고 나면 일은 끝이 없는 일들이고

결국은 사람, 사람과 사람만 남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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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사귀 하나가


                                                         까비르


잎사귀 하나가

바람에 나려

가지에서 떨어져 내리며

나무에게 말하네.

"숲의 왕이여.

이제 가을이 와

나는 떨어져

당신에게서 멀어지네"


나무가 대답하네

"사랑하는 잎사귀여

그것이 세상의 방식이라네

왔다가 가는 것"


숨을 쉴 때마다

그대를 창조한 이의 이름을 기억하라.

그대 또한 언제 바람에 떨어질지

알 수 없으니,

모든 호흡마다

그 순간을 살라.


                                 - 류시화 <아침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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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아랫배를 내려다 보다


                                                               이승하



음모를 본 적이 없었다 한때는 풍성했을까
지금은 듬성듬성 흰색과 갈색도 섞여 있는 음모
바퀴벌레 같은 희망과 토막 난 지렁이 같은 절망
며느리도 간호사도 인상 찌푸리게 하는
기저귀 가는 일과 사타구니 닦는 일
내 몸이 언젠가 저 구멍에서 나왔다니

알몸을 본 적이 없었다
젖가슴 크기를, 유두 색깔을 알 도리 없었다
염하는 중늙은이와 조수인 젊은 친구
무표정한 얼굴로 어머니 몸을 염포로 싸고 있다
체중 줄이지 못해 늘 힘겨워했던 당신의 몸
암세포가 덮친 말년의 고통 말해주듯이
불룩했던 아랫배가 푹 꺼져있다 쭈글쭈글하다
30년 장사하는 동안
체중을 지탱했던 튼실한 두 다리
젓가락이 되어있다

염장이 중늙은이야 뭐 대수롭지 않겠지만
젊은 조수가 내려다보고 있는 어머니의 하체
내 치부를 드러낸 것보다 부끄러워
입안은 마른 염전이 되고
시선은 숨을 곳 찾아 자꾸 달아난다
곶감 같은 저 아랫배
언젠가는 홍시 같았을까
어머니도 아버지한테 이 말을 했을까
- 이리 와서 이 배 좀 만져봐요
태동이 대단한 걸 보니 사내앤가 봐요

저 아랫배 그 언젠가
내 아버지를 달뜨게 했을 것이다
무덤처럼 솟아올랐을 것이다
아랫배 속에서 나 한때 웅크리고 있었겠지만
모레면 배부를 일 다시 없을 세상으로
어머니 저 몸을 불태워 보내드려야 한다



ㅡ <생애를 낭송하다>, 이승하, 천년의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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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박형진


풀여치 한 마리 길을 가는데

내 옷에 앉아 함께 간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언제 왔는지

갑자기 그 파란 남개 숨결을 느끼면서

나는

모든 살아 있음의 제 자리를 생각했다

풀여치 앉은 나는 한 포기 풀잎

내가 풀잎이라고 생각할 때

그도 온전한 한 마리 풀여치

하늘은 맑고

들은 햇살로 물결치는 속 바람 속

나는 나를 잊고 한없이 걸었다

풀은 점점 작아져서

새가 되고 흐르는 물이 되고

다시 저 뛰노는 아이들이 되어서

비로소 나는

이 세상 속에서의 나를 알았다

어떤 사랑이어야 하는가를

오늘 알았다.



산수유꽃 진 자리


                                          나태주



사랑한다, 나는 사랑을 가졌다

누구에겐가 말해주긴 해야 했는데

마음 놓고 말해줄 사람 없어

산수유꽃 옆에 와 무심히 중얼거린 소리

노랗게 핀 산수유꽃이 외워두었다가

따사로운 햇빛한테 들려주고

놀러온 산새에게 들려주고

시냇물 소리한테까지 들려주어

사랑한다, 나는 사랑을 가졌다

차마 이름까진 말해줄 수 없어 이름만 빼고

알려준 나의 말

여름 한 철 시냇물이 줄창 외우며 흘러가더니

이제 가을도 저물어 시냇물 소리도 입을 다물고

다만 산수유꽃 진 자리 산수유 열매들만

내리는 눈발 속에 더욱 예쁘고 붉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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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마음 내게 있어도


                                                나태주



사랑하는 마음

내게 있어도

사랑한다는 말

차마 건네지 못하고 삽니다

사랑한다는 그 말 끝까지

감당항 수 없기 때문


모진 마음

내게 있어도

모진 말

차마 하지 못하고 삽니다

나도 모진 말 남들한테 들으면

오래오래 잊혀지지 않기 때문


외롭고 슬픈 마음

내게 있어도

외롭고 슬프다는 말

차마 하지 못하고 삽니다

외롭고 슬픈 말 남들한테 들으면

나도 덩달아 외록보 슬퍼지기 때문


사랑하는 마음을 아끼며

삽니다

모진 마음을 달래며

삽니다

될수록 외롭고 슬픈 마음을

숨기며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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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끼지 마세요


                                                나태주


좋은 것 아끼지 마세요

옷장 속에 들어 있는 새로운 옷 예쁜 옷

잔칫날 간다고 결혼식장 간다고

아끼지 마세요

그러다 그러다가 철 지나면 헌옷되지요


마음 또한 아끼지 마세요

마음속에 들어 있는 사랑스런 마음 그리운 마음

정말로 좋은 사람 생기면 준다고

아끼지 마세요

그러다 그러다가 마음의 물기 마르면 노인이 되지요


좋은 옷 있으면 생각날 때 입고

좋은 음식 있으면 먹고 싶은 때 먹고

좋은 음악 있으면 듣고 싶은 때 들으세요

더구나 좋은 사람 있으면

마음속에 숨겨두지 말고

마음껏 좋아하고 마음껏 그리워하세요


그리하여 때로는 얼굴 붉힐 일

눈물 글썽일 일 있다한들

그게 무슨 대수겠어요!

지금도 그대 앞에 꽃이 있고

좋은 사람이 있지 않나요

그 꽃을 마음껏 좋아하고

그 사람을 마음껏 그리워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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