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알기 전에는 시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

                                                                           류시화

 

밤늦게까지 시를 읽었습니다

당신이 그 이유인 것 같아요

고독의 최소 단위는 혼자가 아니라

둘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사랑을 만난 후의 그리움에 비하면

이전의 감정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말도

 

시 아니면 당신에 대해 얘기할 곳이 없어

내 안에서 당신은 은유가 되고

한 번도 밑줄 긋지 않았던 문장이 되고

불면의 행바꿈이 됩니다. 

당신을 알기 전에는

시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

당신을 알기 전에는

당신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 

 

*알베르 카뮈가 시인 르네 샤르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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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왜 모를까

 

                                           김용택

 

이별은 손 끝에 잇고

서러움은 먼데서 온다

강 언덕 풀잎들이 돋아나며

아침 햇살에 핏줄이 일어선다

마른 풀잎들은 더 깊이 숨을 쉬고

아침 산그늘 속에

산벚꽃은 피어서 희다

누가 알랴 사람마다

누구도 닿지 않은 고독이 있다는 것을

돌아앉은 산들은 외롭고

마주 보는 산은 흰 이미가 서럽다

아픈 데서 피지 않는 꽃이 어디 있으랴

슬픔은 손 끝에 닿지만

고통은 천천히 꽃처럼 피어난다

저문 산 아래

쓸쓸히 서 있는 사람아

뒤로 오는 여인이 더 다정하듯이

그리운 것들은 다 산 뒤에 있다

사람들은 왜 모를까 봄이 되면

손에 닿지 않는 것들이 꽃이 된다는 것을

 

<제 12회 소월시 문학상 대상>

 

여름일기

                             이해인

 

 

사람들은 나이 들면

고운 마음 어진 웃음 잃기 쉬운데

 

느티나무여 당신은 나이 들어도

어찌 그리 푸른 기품 잃지 않고

넉넉하게 아름다운지

 

나는 너무 부러워서

당신 그늘 아래 오래오래 않아서

당신의 향기를 맡습니다. 

 

조금이라도 당신을 닮고 싶어

시원한 그늘

떠날 줄을 모릅니다

 

당신처럼 뿌리가 깊어 더 빛나는 

시의 잎사귀를 달 수 있도록

나를 기다려주십시오

 

당신처럼 뿌리 깊고 넓은 사람을

나도 하고 싶습니다

새들의 장례식

 

                                       이호준

 

 

하늘에 금이 그어지지 않았다고

새들이 모든 공간을 욕망하는 것은 아니다

 

먹이를 구하려 바람 열고 오르는 아침, 

지는 해 지고 누항으로 돌아가는 저녁,

겸손한 날갯짓으로 하늘 한쪽 빌리는 것이다

 

그리고 생애 단 한 번

사랑하는 이 고단한 날개 접고 작별한 날,

숨 한 모금 깊이 들이쉬고

까마득히 날아오르는 것이다

 

하늘에 눈물을 묻고 내려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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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잎 지다

                            이호준

 

가을비 속에 신발을 잃어버린 새들

어디서 시린 발 말리고 있을까

저물녘 오목눈이 몇 마리 비 긋고 간

아미타전 단풍나무 아래

주인 잃은 신발들 오소소 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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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에게 빚 지다

                                    이호준

 

나는 언제나 슬픔에 빚지고 산다

수시로 눈물을 갖다 쓰고 친구들에게도 나눠준다

가끔 우울이라는 얼굴도 빌려 쓰지만 

값을 치르거나 돌려준 적은 없다

 

그녀 손 잡고 마지막 꽃을 전송하던 밤이었던가

은하수에 물수제비 뜨던 밤이었던가

목 짧은 새가 울음을 잃어버린 날일지도 몰라

 

내가 빌려다 엎지른 슬픔으로 세상이 흥건했지

 

스스로 불 지른 심장은 시간이 가도 재가 되지 않아

목젖까지 태울 것 같은 불꽃만 남기지

 

그날은 사막으로 도망치는 꿈을 꾸었어

모래산 자명 속에 곱게 부서진 나를 뉘어두고

누가 물으면 낯선 얼굴로 고개 저었어

나는 꿈에서 스스로 돌아온 적이 한번도 없지

 

푸른 냉기 밟으며 창백한 달빛이 오고

핏줄마다 숨겨둔 길들 시위하듯 요동치는 걸 보면

강파른 바람 또 한바탕 불 것 같아

내 안에 전에 없던 사구들이 태어나겠어

 

날 밝는대로 슬픔에게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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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주막

                                      이호준

 

 

나무가 부지런히 허공에 길을 닦는 건

세상 등지고 떠나려는 게 아니다

집 없는 새들 부르려는 것이다

삭풍 사나운 길목에 주막집 지어

저물녘 쉴 곳 못 찾아 배회하는 새들 앉혀놓고

뜨끈한 국밥 한 그릇 먹이려는 것이다

봉놋방에 군불 지펴

고단한 날개 눅여 가게 하려는 것이다

 

나무가 겨울에도 잠들지 않는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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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니 알겠더라

 

                                조관희

 

떠오르는 수 많은 생각들 속에

한 잔의 커피에 목을 축인다

 

살다보니 긴 터널도 지나야 하고

안개 낀 산 길도 홀로 걸어야 하고

바다의 성난 파도도 만나지더라

 

살다보니 알겠더라

꼭 만나야 할 사람은 만나고

 

스치고 지나야 하는 것들은

꼭 지나야 한다는 것도...

 

떠나야 할 사람은 떠나고

남아야 할 사람은 남겨지더라

 

두 손 가득 쥐고 있어도

어느샌가 빈 손이 되어 있고

 

빈 손으로 있으려 해도

그 무엇인지를 꼭 쥐고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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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교 마을의 봄

 

                         윤한로

 

우리 분교 마을엔

산 너머 너머 언니가

가는 체로 쳐 보낸

고운 바람

 

사택 울타리엔

노란 봄

 

먼 산엔

붉은 봄

 

하늘엔

뻐꾹 봄

 

손등엔

쓰린 봄

 

내 마음엔

산 너머 너머 언니가

튼 손 씻어 주던

아직도 작년 봄

 

 

 

※ 198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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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엘렌바스

                         류시화 옮김

 

삶을 사랑하는 것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을 때에도

소중히 쥐고 있던 모든 것이

불탄 종이처럼 손에서 바스라지고

그 타고 나은 재로 목이 멜지라도

 

삶을 사랑하는 것

슬픔이 당신과 함께 앉아서

그 열대의 더위로 숨 막히게 하고

공기를 물처럼 무겁게 해

폐보다는 아가미로 숨 쉬는 것이

더 나을때에도

 

삶을 사랑하는 것

슬픔이 마치 당신 몸의 일부인 양

당신을 무겁게 할 때에도

아니, 그 이상으로 슬픔의 비대한 몸집이

당신을 내리 누를 때

내 한 몸으로 이것을 어떻게 견뎌내지 하고

생각하면서도

 

당신은 두 손으로 얼굴을 움켜쥐 듯

삶을 부여잡고

매혹적인 미소도, 매혹적인 눈 빛도 없는

그저 평범한 그 얼굴에게 말한다.

그래, 너를 받아들일거야

너를 다시 사랑할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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