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에게 빚 지다

                                    이호준

 

나는 언제나 슬픔에 빚지고 산다

수시로 눈물을 갖다 쓰고 친구들에게도 나눠준다

가끔 우울이라는 얼굴도 빌려 쓰지만 

값을 치르거나 돌려준 적은 없다

 

그녀 손 잡고 마지막 꽃을 전송하던 밤이었던가

은하수에 물수제비 뜨던 밤이었던가

목 짧은 새가 울음을 잃어버린 날일지도 몰라

 

내가 빌려다 엎지른 슬픔으로 세상이 흥건했지

 

스스로 불 지른 심장은 시간이 가도 재가 되지 않아

목젖까지 태울 것 같은 불꽃만 남기지

 

그날은 사막으로 도망치는 꿈을 꾸었어

모래산 자명 속에 곱게 부서진 나를 뉘어두고

누가 물으면 낯선 얼굴로 고개 저었어

나는 꿈에서 스스로 돌아온 적이 한번도 없지

 

푸른 냉기 밟으며 창백한 달빛이 오고

핏줄마다 숨겨둔 길들 시위하듯 요동치는 걸 보면

강파른 바람 또 한바탕 불 것 같아

내 안에 전에 없던 사구들이 태어나겠어

 

날 밝는대로 슬픔에게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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