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낙타였나 보다
류시화
나는 낙타였나 보다
세상이 사막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입술 하얗게 갈증 심할 뿐
이따금 발 헛디딘 것이 전부였는데
여기까지 와서 신발 벗어 보니 모래 가득하다
별 밟고 다닌 줄 알았는데
눈썹에 얹힌 후회의 먼지 해를 가리고
일부러 넘어진 건지 삶이 비탈진 건지
아무래도 나는 무르팍에 옹이 박힌
낙타였나 보다
나는 담쟁이였나 보다
인생을 벽이라고 여기지 않았는데
깨달음이라든가 진리라든가
더 큰 주제 향해 촉수 뻗어 나간 줄 알았는데
이제 와 보니 간신히 벽 하나 타고 올라가
담 위로 얼굴 내밀었을 뿐
자유로이 행로 넓히며 돌아다녔다 자부했는데
겨우 연두 몇 장 내보였을 뿐
아무래도 나는 남의 어깨에 발돋움하고 살아온
담쟁이넝쿨이었나 보다
나는 복화술사의 인형이었나 보다
나만의 어법으로 사람에게 다가간다 믿었는데
가난한 말로 먹고사는 일인극 배우처럼
나의 전 생애가 단지 혼잣말은 아니었을 것인데
물음과 되물음 속에 그저 입술만 움직이며
폐에서 불어 대는 바람 소리
그리움에는 거짓이 없다는데
마냥 타인의 말투 흉내 내며 살아온 건 아닌지
아무래도 나는 갈구하는 입놀림에 불과한
복화술사의 인형이었나 보다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작별이 서툴다 | 류시화' (0) | 2024.12.18 |
---|---|
생각해 보았는가 | 류시화 (0) | 2024.12.18 |
당신을 알기 전에는 시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 |류시화 (0) | 2024.12.18 |
사람들은 왜 모를까 | 김용택 (0) | 2024.08.14 |
여름일기 | 이해인 (0) | 2024.08.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