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낙타였나 보다

 

                                         류시화

 

나는 낙타였나 보다

세상이 사막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입술 하얗게 갈증 심할 뿐

이따금 발 헛디딘 것이 전부였는데

여기까지 와서 신발 벗어 보니 모래 가득하다

별 밟고 다닌 줄 알았는데

눈썹에 얹힌 후회의 먼지 해를 가리고

일부러 넘어진 건지 삶이 비탈진 건지

아무래도 나는 무르팍에 옹이 박힌

낙타였나 보다

 

나는 담쟁이였나 보다

인생을 벽이라고 여기지 않았는데

깨달음이라든가 진리라든가

더 큰 주제 향해 촉수 뻗어 나간 줄 알았는데

이제 와 보니 간신히 벽 하나 타고 올라가

담 위로 얼굴 내밀었을 뿐

자유로이 행로 넓히며 돌아다녔다 자부했는데

겨우 연두 몇 장 내보였을 뿐

아무래도 나는 남의 어깨에 발돋움하고 살아온

담쟁이넝쿨이었나 보다

 

나는 복화술사의 인형이었나 보다

나만의 어법으로 사람에게 다가간다 믿었는데

가난한 말로 먹고사는 일인극 배우처럼

나의 전 생애가 단지 혼잣말은 아니었을 것인데

물음과 되물음 속에 그저 입술만 움직이며

폐에서 불어 대는 바람 소리

그리움에는 거짓이 없다는데

마냥 타인의 말투 흉내 내며 살아온 건 아닌지

아무래도 나는 갈구하는 입놀림에 불과한

복화술사의 인형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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