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팝나무에 비 내리면
황종권
당신은 육지를 떠나기 전이면 뒤뜰에 있는 이팝나무 아래로 불러내곤 했지요
이팝나무 한 뼘 위를 회칼로 그으며,
그만큼 자라면 온다고 무슨 굳센 다짐처럼 말하곤 했었지요.
하루에도 몇 번이고 이팝나무 아래에서 키를 재어보았는데요.
키 대신 등짝에 파도 소리가 자라곤 했었지요. 해가 기울수록 길어지는 그늘은
내가 미리 살아버린 주름이었을까요.
이팝나무는 꽃을 버릴 때마다 나이테가 늘어갔던 거예요.
먼바다에서 당신 배가 물결을 가를 때마다 일어나는 물살이,
제가 엉덩이 깔고 앉아 있는 포구끝에도 닿는 것일까요.
하얗게 터지는 물살에선 목욕탕 스킨 냄새가 나네요.
바다가 물결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물결이 바다를 그물처럼 가두고 있단 생각을 했어요.
바다가 당신의 것이 아니라, 당신이 바다의 것이었거든요.
어둠이 달을 꽉 가두고 있는 밤은 비가 내렸지요. 어김없이 부엌은 생선 굽는 냄새에
몸살을 알았고요. 저녁상에 올라온 민어를 뒤집다가 손등을 얻어 맞기도 했어요.
하늘에서도 물고기가 튀는 것일까요. 유리창에 맺히는 빗소리에선 심한 비린내가 나요.
그런 날은 이불 속에서 뒤척거리는 일도 조심스러워요.
나는 당신에게 수평선을 그어주던 아이였을까요
당신의 주름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던 달의 인력이 오늘 밤은 시린 손가락으로
내 발목을 잡는걸요. 밀물 든 바닷가에선 빗소리가 주저앉고요. 일어버린 당신의 키는
언제쯤 만조를 이룰 수 있을까요. 사리와 같은 당신과나와의 거리에선 빗소리가 쌓이지요.
비가 오는 밤은 달이 이빨 아픈 꿈을 꾸는 건가 봐요. 이팝나무에 빗소리를 그어 놓으면
우린 한 뼘 지워질 수 있을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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