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워, 내 인생에 늦지 않게 도착 해줘서 고마워 (44쪽)
푹 익은 과일이 저 스스로 무게를 못 견뎌 떨어지듯 저 멀리 매달아 놓은 나의 응어리진 마음이 툭 하고 떨어져 저 아래로 굴러간다. 어느 틈에 새싹을 피워서 빳빳하게 자세를 세운 나의 자존심이 바람 제법 차게 불어오는 가을이 되어서야 고개를 숙인다. 시간ㅇ이 지나면 풀리게 되는 마음이 있고 이해되는 사람이 있다.(50쪽)
사랑하는 것들을 꽈악 안을 때마다 나는 포옥 안기곤 했다(63쪽)
기억을 잘하는 건 기억하려고 노력해서 기억하는 것이고 잊지 못하는 건 기억하려고 하지 안하도 기억되는 거고. 그치? 붕어가 3초 전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아가미로 숨 쉬는 것은 잊지 못하잖아. 그건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잊지 못하고 살아가는 거잖아(119쪽)
기억이란 거 참 우습기도 하지. 살이 붙어 버려서 잊어 버리게 되다니 말이다. 기억에 기억이 붙어서 기억이란 덩어리가 커지면 전의 기억은 밀려나게 되는 것이다. (131-132쪽)
사람을 사람으로 지우기 시작하다 보면 편한데요. 그게 나중엔 엉켜서 뭐가 그리운지 뭐가 슬픈지 잘 몰라요. 마음에 너무도 많은 흔적이 남아서, 그전의 하얀색 마음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거예요. (중략) 그거, 못 잊은 거예요. 마음에 얼룩이 덕직덕지 묻어 있어(163쪽)
사람을 잊는다는 것이 그러더라고요. 이제 괜찮아진 나를 보고 이미 오래전에 괜찮았을 당신이 생각나서 내 마음은 다시 추락해요.
흔하게 들릴 수도있겠지만, 잊을만 하면 생각나요. 지금 이 이야기를 하면서도 또 생각나요. 난 분명 괜찮았는데 오늘 밤은 또 다시 몸살에 걸릴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에요.
사람은 기억하는 동물이라는 게 정말 지긋지긋해요(190-191쪽)
합쳐진다는 것은 갈라지기 위한 중간점에 지나지 않는다랄까요(195쪽)
"사랑에도 천국과 지옥이 있다면 내 사랑은 지옥에 떨어졌을 거예요. 나는 살면서 너무 많은 자살을 했는걸요. 진짜 자살은 아닌 거 알죠? 나는 자라나는 내 마음을 너무 많이 죽였어요. 죽이고 숨기고 베개로 입을 틀어막곤 눈물로 적시곤 했죠. 그래서 나는 구원 받을 수 없어요. 사랑을 스스로 죽이지 마요. 차라리 여러분의 마음이 타살당하는 것이 나아요. 그래야 여러분의 사랑이 처국에 머무를 수 있어요"(197쪽)
"괜찮아,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마, 지나갈 거야"(219쪽)
찾아와준다는 것은, 할머니의 말대로 모든 것을 잊어버려도 될 만큼 중요한 것이다. 찾아와준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지킬 것이 생기는 것. 굳이 변하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니, 변하려고 하지 않아야만 하는 것. 있는 그대로가 참 좋아지는 것(253-254쪽)
나는 또 물었다. 색을 반사하는 것이 아니라 품고 있어야 그 색으로 보이는 거 아니냐고 말이다
(중략)
엄마는 이에 웃으며 이야기했다 "얘야 세상 모든 것은 품은 것과는 반대로 보여지려고 하는 거란다"
(중략)
이제야 그 뜻을 깊이 이해했다. 전부 무채색이라는 말, 채도 없는 삶을 이어가는 것이구나 하고. 그 중에 어떤 품지 못하는 마음을 무던히도 내비치고 있는 것이었다. 서로가 상반됨에 수렴하는 마음끼리 품고 반사되고를 반복하는 것이다(259-261쪽)
씨앗이 죽어야 싹을 트일 수 있다. 언제나 끝이라고 한숨 쉴 때에, 들숨으로 새로운 공기가 들어온다. 모든 끝은 시작과 같을 때 이룰 수 있고 또 모든 시작은 끝처럼 간절해야 위대할 수 있다.(270쪽)
나무에 나이테가 있듯, 사람의 인생은 그 손톱이 나타낸다. 그래서 언제나 사내의 손톱은 닳아버린 몽땅연필같이 뭉툭하고 날이 죽어있었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사내의 손톱엔 날이 날카롭ㅂ게 세워져 있었따. 그것으로 긁은 국화의 줄기에서 퍼런 눈물이 흐른다. 사내에게 있어, 할머니의 침묵은 그런 존재였다.
한껏 닳아버린 삶에 빈틈이 생기는 것. 단단하게만 느껴졌던 아버지의 삶의 일부분이 뜯겨나가는 것. 톱날 같은 당신의 손톱이, 그날의 불안함을 말해줬다. 아버지의 입술에는 굳은 피가 흐른다(2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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