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그래피/박노해 시
광야의 밤
박노해
광야의 밤은
어둠이 크다
오늘 밤은
야생화 요를 깔고
별 이불을 덮고
바람의 노래로
잠이 든다
그대만 곁에 있으면
좋은 밤이련만
작게 살지 마라
박노해
내 힘으로 공들여서
쟁취하지 못한 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받을 권리가 있다고 여기고
받는데 익숙해지면
늘 받기만 바라는 존재로
퇴화해 갈 것이다
쟁취하라, 오직 자신의 힘과 분투로
그리하면 두 가지를 얻게 될 것이다.
쟁취한 그것과
언제든 새로운 것을 쟁취할 힘과
가능성의 존재인 자기자신을
작게 살지 마라
작아도 작게 살지 마라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을 따라가다 보면
소소한 것들이 기쁨이 되고 고통이 되고
소소한 것들이 전부가 되고 상처가 된다
작게 살지 마라
지금 가진 건 작을지라도
인간으로 작게 살지 마라
꽃씨를 심어요
박노해
지난 가을
그대가 보내준 편지봉투에
꽃씨를 받아 넣었죠
눈 내리는 겨울밤에
책장 선반 구석에서
봉투 안의 꽃씨들이
소곤소곤 속삭이는 소리에
몸을 뒤채며 봄을 기다렸죠
첫 봄비가 내리고
그대가 보내준 편지를 다시 읽으며
봉투에 간직해온 꽃씨를 심어요
내가 여기 태어나
지구에서 가장 좋아하는 건
꽃과 나무, 그리고 그대이죠
비바람과 눈보라 속에서도
원망하지도 않고 포기하지도 않고
최선을 다해 꽃과 향기를 내어주고
한 생의 결실을 이 작은 꽃씨에 담아
긴 겨울날을 우리 함께 걸어왔죠
좋지 않은 일들이 한꺼번에 오고
좋지 않은 자들이 봄을 밟고 와도
눈 녹은 땅에 꽃씨를 심어요
지구에서 보낸 한 생의 길에서
곧고 선한 걸음으로 꽃을 피워온 그대
사랑이 많아서 슬픔이 많았지요
사랑이 많아서 상처도 많았지요
그래도 좋은 사람에게 좋은 일이 오고
어려움이 많은 마음에 좋은 날이 오고
눈 녹은 땅에 씨 뿌려가는 걸음마다
봄이 걸어오네요
꽃이 걸어오네요.
그 약속이 나를 지켰다
박노해
널 지켜줄께
그 말 한마디 지키느라
크게 다치고 말았다
비틀거리며 걸어온 내 인생
세월이 흐르고서 나는 안다
젊은 날의 무모한 약속
그 순정한 사랑의 언약이
날 지켜주었음을
나는 끝내
너를 지켜주지도 못하고
깨어지고 쓰러지고 패배한
이 치명상의 사랑 밖에 없는데
어둠 속을 홀로 걸을 때나
시련의 계절을 지날 때도
널 지켜줄게
붉은 목숨 바친
그 푸른 약속이
날 지켜주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