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은 뜰채와 같아서

                                               박노해

 

추억은 뜰채와 같아서

흐르는 물처럼 생생한 시간은

틈 사이로 빠져나가 버려서

없네, 남은것은

 

습관이 된 슬픔의 굳은 발뒤꿈치

길을 가다 돌부리를 밟으면

후청, 갈라져 피가 비치는

갈라진 시간의 발뒤꿈치 같은

 

상처를 남겨두라

                                     박노해

 

거울 앞에 서면 먼저 상처가 눈에 띈다

고문으로 상한 콧등과 급히 꿰맨 오른손

여기저기 독재 시대가 몸에 남긴 상처들

 

간단한 수술로 고칠 수 있다며 지인들이 치료를 권하고

험한 시절을 겪으며 무의식에도 상처가 남았을테니

심리 치료를 해주겠다고 선의의 전문가들이 찾아온다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본다

많은 결함과 인간적 한계를 지닌 존재지만

그럼에도 난 미치거나 자살하지 않았고

원한과 증오에 잡아먹히지도 않았고

내 상처를 내세우거나 떠넘기지도 않고

제대로 울고 제대로 웃고 나의 길을 가고 있다

 

상처는 단지 흉터가 아니다

내 인생의 흔적이고 삶의 무늬이다

나의 불운 나의 오류 나의 약점 나의 죄마저

그것이 있음으로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고

그 상처가 나를 구성하고 생성하고 있다

 

하여나는 숨 쉴 때마다 힘이 드는

부러진 콧등의 불편함을 견디며 기억하련다

이 오랜 상처와 매일의 고통들이

무엇을 싹 틔우고 무엇을 비춰주고

무엇을 낳아 갈지는 신비의 영역이다

 

그러니 제발 상처를 남겨두라

모든 인간을 환자로 만드는 섣부른 짓을 그만두라

그 사건과 경험의 기억자로, 각자 감당할 몫으로,

자기만의 상처를 제발 남겨두라

 

상처를 눈감지도 말고 감춪도 말고

상처로 겁주거나 애써 후벼 파지도 말고

세월과 성숙 속에 좀 내비두라

 

사람에겐 견디는 힘과 승화의 힘이

자연히 자신 안에 내재되어 있으니

스스로 치유할 여지를 남겨두라

인간의 신비를 신비로 남겨두라

하늘이 낸 목숨, 하늘이 보살피게

하늘의 몫을 좀 남겨두라

 

상처받는 순간이야말로

마음이 열려있는 순간이지 않은가

마음을 열지 않는다면 가슴 아프지도않다

사랑은 기꺼이 상처를 입는 것

사랑하지 않는다면 상처받지도 않는다

상처 하나 없는 그는 타인들을 상처 낼 뿐,

내가 상처받은 지점이야말로

위대한 힘이 깃든 빛의 장소일 수 있으니

 

상처위에 새로운 상처가 와도

상처받으면서도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기를

상처 속에서도 선한 걸음을 멈추지 말기를

사랑하고 다시 사랑하기를

 

 

괜찮아 괜찮아

                                박노해

 

괜찮아 괜찮아

잘못 가도 괜찮아

잘못 디딘 발걸음에서

길은 찾아지니까

 

괜찮아 괜찮아

떨어져도 괜찮아

굴러떨어진 씨앗에서

꽃은 피어나니까

 

괜찮아 괜찮아 

실패해도 괜찮아

쓰러지고 깨어져야

진짜 내가 살아나니까

봄이네요 봄

                                    박노해

 

겨울은 등 뒤에서 슬금슬금 걸어왔지만

봄은 앞길에서 아롱아롱 찾아옵니다

하루 아침에 봄이네요 봄

 

겨울은 어깨 위로 으슬으슬 내려왔지만

봄은 발밑에서 으쓱으쓱 밀어옵니다

아래로부터 봄이네요 봄

 

겨울은 준도비 없는 얆은 자에게 먼저 왔지만

봄은 많이 떨고 많이 견딘 자에게 먼저 옵니다

간절한 자의 봄이네요 봄

 

아직 오지 않아도 이미 오고 있고

아직 보이지 않아도 나를 감싸는

봄이네요 봄

 

꽃눈의 기척처럼 토옥 톡 토옥

마음이 사우치면 꽃이 피는

봄이네요 봄

  

 

 

 

 

 

 

 

20210615 초판2쇄, 느린걸음, 글사진박노해

 

 

걷는독서는

페북에서 먼저 접했다. 

짧지만 울림이 있는 글귀들이 좋았는데

어느 날 그 글들이 책으로 나온다하여

지인에게 선물과 함께 구매한 책이다. 

 

이 책은 한 번 읽고 덮어둘 책이 아니다. 

실력은 없지만, 몇몇 구절은 캘리로도 써 보았다. 

 

 

그래도 미움으로 살지 말거라

                                             박노해

 

어머님 집에서 자고 난 아침

눈을 뜨니 어머니가 이마를 짚은 채

나를 내려다보고 계셨다

 

아직도 많이 아프냐아?

고문 독은 평생을 간다더니..

 

아뇨, 어제 좀 고단해서요

나는 황급히 일어나 상한 몸을 감추며

태연히 얼굴을 씻는다

 

어머니가 기도를 마친 후 곁에 앉아

가만가만 두런거리신다

 

이승만 죽고 박정희 죽을 때도 나는 기도했다

전두환 노태우 감옥 갈 때도 나는 기도했다

잊지는 말아라 용서도 말거라

그래도 미움으로 살지 말거라

 

죽은 내 어머니는 그랬다

사람은, 미움으로 살아서는 안된다고

 

인생은, 사랑으로 살아내야 한다고

곧고 선한 마음으로 끝내 이겨내야 한다고

 

 

나무를 바라보자

                                            박노해

 

사나운 말들이 비처럼 쏟아질 때

푸른 나무를 바라보자

 

거짓과비난이 오물처러 튀겨올 때

푸른 나무를 바라보자

 

나무는 깨끗한 물만으로는

푸른 잎을 틔워내지 못하니

 

나무는 더러운 것들을 거름 삼아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으니

 

더러운 것들의 표적이 된장여

사악한 자들의 표적이 된 자여

 

눈물로 푸른 나무를 바라보자

의연히 루픈 나무를 바라보자

 

 

누가 보아 주지 않아도

                                                      박노해

 

알려지지 않았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드러나지 않는다고

위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누가 보아주지 않아도

밤하늘에 별은 뜨고

계절 따라 꽃은 피고

 

누가 보아주지 않아도

나는 나의 일을 한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나는 나의 길을 간다

 

 

늘 단정히

                                            박노해

 

초등하교 입학식 날

낡은 옷을 빨아서 풀을 먹이고

숯불 다리미로 다려 입혀주며

어머니가 당부하셨다. 

 

아들아, 오늘부터 넌 어엿한 학생이다

늘 마음을 밝게 하고 시선을 바로 해야 쓴다

아비 없는 자식이라고 몸가짐과 옷차리마저

단정치 못하면 그건 네 탓이다

가난과 불운이 네 눈빛을 흐리게 하지 말거라

이제 너는 스스로 헤쳐 갈 창창한 학생이다

 

그날 아침 혼자서

타박타박 황톳길을 걸어 입학식에 가던 나는

학생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걸어 나가던 나는

떨리고도 환한 마음으로 입술을 꼬옥 물었다

 

그날 이후 아무리 험한 조건에서도

나는 어머니의 그 말을 떠올려왔다

공장에서도 군대에서도 수배 길과 감옥에서도

내 처소와 살림과 옷차림을 단정히 하고

 

밝은 마음과 미소를 잃지 않고 시선을 바로 하여

사람과 세상을 정면으로 바라보고자 노력했다

밥을 먹을 때 말을 할 때도 글씨를 쓸 때도

걸음을 걸을 때도 늘 반듯이 하고자 애써왔다

 

가난하고 힘이 없고 고달프다하여

내가 할 수 있는 내면의 빛과 소박한 기품을

스스로 가꾸지 않으면 나 어찌 되겠는가

내 고귀한 마음과 진정한 실력과 인간의 위엄은

어떤 호화로운 장식과 권력과 영예로도

결코 도달할 수 없고 대신할 수 없으니

 

늘 단정히

늘 반듯이

늘 해맑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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