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그래피/양광모 시
너에게 가는 길
양광모
너를
처음 만난 후
내 가슴에
낯선 길 하나 생겼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 같다
멈추지 마라
양광모
비가와도
가야 할 곳이 있는
새는 하늘을 날고
눈이 쌓여도
가야 할 곳이 있는
사슴은 산을 오른다
길이 멀어도
가야 할 곳이 있는
달팽이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길이 막혀도
가야 할 곳이 있는
연어는 물결을 거슬러 오른다
인생이란 작은 배
그대 가야 할 곳이 있다면
태풍 불어도 거친 바다로 나아가라
세 개의 촛불이 켜지는 일
양광모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리움 믿음 용서
세 개의 촛불이 가슴에 켜지는 일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는 겁니다
그리움의 촛불은 켜져 있는데
믿음의 촛불이 꺼져 있다면
믿음의 촛불은 켜져 있는데
용서의 촛불이 꺼져 있다면
그것은 사랑을 위한 사랑이라 부르는 겁니다
그 사람과 헤어졌는데
그리움 믿음 용서
세 개의 촛불이 가슴에 계속 타오르는 일
그것을 변함없는 사랑이라 부르는 겁니다.
자화상
양광모
때로는 꽃도 피워냈기에
가시 돋은 몸 장미려니 믿으며 살아온
선인장 한 그루
오늘도 태양의 주문을 외운다
어린왕자야
사막이 아름다운 건
샘이 아니라 선인장 때문이란다
가슴에 사막 하나 펼쳐져 있지 않은
삶이 어디 있으랴
나는 왜 수직으로 질주하는가
양광모
삶은 늘
낯설기만 하더라
우연히 마주친 옛 애인의 웃음처럼
수십 년을 마주한 거울 속 내 얼굴처럼
삶은 늘
낯익지가 않더라
그리하여 나는
수평으로의 진군을 멈추고
수직으로 수직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한 번도 도달해 본 적 없는
수직의 밑바닥에서
낯설지 않은
풍경 하나 건져
내 낯선 삶에 슬쩍 끼워 넣으려는 것이다.
그런데 어쩌면
낯익은 삶이라는 것도
헤어진 옛 애인의
슬픈 눈물 같은 것은 아닌지 싶어
나는 수직으로 수직으로 질주하는 것이다
낙조
양광모
울며 떨어지는
붉은 새 한 마리
내일은 새 세상
오거라
내게는 나무 뿌리를 닮은 한 슬픔이 있다
양광모
내게는 나무 뿌리를 닮은
한 슬픔이 있다
일생을 땅속에 묻혀 지내다
비 오는 날이면
등뼈를 드러내고 울어야 하느니
푸른 잎이여 가지여
영원히 벗어날 수 없어도
죽는 날까지 뻗어 나가야 하는
나무뿌리를 닮은 한 사랑이
내게는 있다
권추가
양광모
단풍이 좋아 단풍과 한 잔
낙엽이 좋아 낙엽과 한 잔
당신이 좋아 당신과 한 잔
가을이 좋아 가을과 한 잔
인생은
짧은 단풍 긴 낙엽이려니
그대는 술을 권하라
나는 가을을 권하리
눈 내리는 날의 기도
양광모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 누구에게나
첫눈처럼 기다려지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한 송이 한 송이씩 떨어지지만
이내 뭉쳐 하나가 되는 사람
세상의 모든 상처와 잘못을
깨끗함으로 덮어주는 사람
겨울의 깊고 어두운 밤마저
하얗게 빛으로 밝혀주는 사람
눈사람처럼 홀로 서 있어도
묵묵히 겨울바람을 이겨내는 사람
아이에게는 기쁨을 연인에게는 사랑을
어른에게는 추억과 행복을 가져다 주는 사람
누군가 자신을 밟고 지나갈 때조차
뽀드득 뽀드득 맑은 소리를 내는 사람
이 세상 떠나는 날 누구에게나
첫눈보다 아르마운 기억으로 남게 하소서
가을날의 묵상
양광모
위우침으로
얼굴 붉어진 단풍잎처럼
뉘우침으로
목까지 빨개진 저녁노을처럼
가을은 조금
부끄럽게 살 일이다
지나간 봄날은
꽃보다 아름다웠고
지나간 여름날은
태양보다 더 뜨거웠으리
그럼에도 뉘우칠
허물 하나 없이 살아온 삶이란
또 얼마나 부끄러운 죄인가
믿으며, 가을은
허물 한 잎 한 잎 모두 벗어 버리고
기쁜 듯 부끄럽게 살 일이다
이윽고 다가올 순백의 계절
알몸으로도 거리낌 없이
부끄러운 듯 기쁘게 맞을 일이다.